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만 부총통 (문단 편집) === 헌정 이전 === 부총통 직책은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마련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난징]] 임시참의원이 수립되자 호북 군정부의 수장이었던 리위안훙은 임시참의원에 의해 임시부총통에 추대되었다. 리위안훙은 이를 수락하여 1월 3일 '''중화민국 임시부총통'''(臨時副總統)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 10월 7일 국회 투표에서 리위안훙은 정식 부총통에 선출되었고 10월 10일 1대 정식부총통에 취임하게 된다. 1915년 [[홍헌제제]]가 단행되면서 부총통직이 폐지되고 리위안훙은 12월 15일 친왕에 책봉되지만 [[호국전쟁]] 발발 이후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면서 다시 부총통에 복직했다.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6월 7일 부총통 [[리위안훙]]이 총통에 계임하면서 부총통직은 공석이 되었다. 리위안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는 남방에 국회와 약법을 회복시켜달라는 군무원의 요구를 수락하여 [[호국전쟁]]이 종결되었고 8월 1일 국회가 개막되었다. 10월 30일, 국회는 신임 부총통으로 직예군벌의 수장인 강소도독 [[펑궈장]]을 선출하였는데 펑궈장은 11월 8일이 되어서야 난징의 도독부에서 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1917년 7월, [[장훈복벽]]으로 리위안훙이 7월 2일 총통 사직을 선언하고 [[톈진]]의 [[일본제국|일본]] [[공사관]]으로 도주하자 펑궈장은 대총통을 계임해달라는 리위안훙의 요청을 수락한다고 통전하고 난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부총통은 다시 공석이 되었다. 1918년 [[펑궈장]]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새로운 정부총통 선거가 이루어졌는데 대총통에는 [[쉬스창]]이 무난하게 선출되었으나 부총통에는 [[직예군벌]]의 [[차오쿤]], [[봉천군벌]]의 [[장쭤린]], 서남군벌의 [[루룽팅]], 정학회 수장 [[천춘쉬안]] 등이 쟁쟁하게 대립하고 있어서 선출이 어려웠다. [[북양군벌]]에서는 [[호법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차오쿤이나 장쭤린을 부총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며 대총통 쉬스창, 서남군벌, 교통계에서는 남북 화해를 위해 거국적으로 남측의 인물인 루룽팅이나 천춘쉬안을 부총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립이 너무 치열하다보니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부총통 선출에 다들 흥미를 잃어버렸다.(...) 거기에 당시 중화민국의 투표는 투표의 대가로 돈을 주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북양군벌 측에서 남방인사가 뽑힐 가능성이 높은 투표에 돈을 대는 것을 거부하면서 국회의원들도 투표를 거부하여(...) 자동적으로 부총통 선거는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었고 북양정부는 부총통 선거 무기한 연기를 선포했다. 이에 따라 1923년 선거에서는 대총통은 뽑았으되 부총통 선거는 하지 않았다. 1924년 [[북경정변]] 이후 집정제가, 1926년 [[장쭤린]]에 의해 대원수제가 도입되면서 총통 자리가 사라졌는데 부총통 자리가 남아있을리 만무했고, [[국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수반]]이 총통이 아니라 [[국가주석]]으로 바뀌면서 아예 폐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